솔깃한 제안으로 욕심에 눈 멀게 하라
[박상기의 협상은 영화처럼 영화는 협상처럼]<22> 뱅크잡 (The Bank Job)
한경 머니,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12-21 오후 4:10:32
감독 로저 도날드슨
각본 딕 클레멘트, 이안 라 프레나이스
주연 제이슨 스테이섬(테리 역) / 섀프론 버로즈(마틴 역) / 다니엘 메이스(데이브 역) / 스티븐 캠벨 무어(케빈 역) / 제임스 폴크너(가이 역) / 리차드 린턴(팀 역) / 데이빗 서쳇(보겔 역)
1971년 런던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은행털이 사건을 배경으로 제작된 범죄스릴러 '뱅크잡'. 단순한 은행강도 사건이 아니라, 생전 뛰어난 미모와 연애행각으로 잦은 구설수에 오르는 등 영국 왕실의 스캔들 메이커였던 마가렛 공주의 섹스 스캔들을 사건의 주 소재로 삼았다. 황실을 보호하기 위한 영국 정보국 MI5이 배후 조종한 은행털이범들과 부패한 런던경찰, 그리고 악덕 포주까지 묘하게 얽혀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확대 전개된다. 오늘은 그 중 한가지 복합협상전술을 알아보자.
▲ 뱅크잡
런던 뒷골목에서 허름한 중고자동차 판매상을 운영하는 테리(제이슨 스테이섬 분). 차도 안 팔리는 데다 밀린 돈 갚으라는 사채업자의 협박은 점점 더 거세지고 정말 죽을 맛이다. 이때 오랜 동안 별 소식 없다 불현듯 나타난 미모의 옛 애인 마틴(섀프론 버로즈 분). 그리고 그녀가 제안한 것은 뜻밖에도 로이드 은행의 비밀금고를 테리의 친구들과 힘을 합쳐 털자는 게 아닌가..
마틴 : 테리 난 널 알아. 네 친구들도 알고. "넌 언제나 큰 것 한방을 찾아 헤맸지. 모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줄 한 방. 내가 그 한방을 줄게."① (I know you, Terry. And I know your mates. You've always been looking for the big score, the one that makes sense of everything. I have it for you.)
테리 : 그게 뭔데?
마틴 : 은행이야.
은행강도란 얘기에 화들짝 놀라는 테리. 테리나 그 친구들이라 해 봤자 기껏해야 잡범 정도 경력에 불과한데 은행강도라니 가당치 않다고 펄쩍 뛴다. 그러나 마틴의 집요하고 달콤한 유혹은 계속된다.
마틴: 테리, 이건 은행직원 머리에 딱총이나 휘둘러 어찌 해보겠다는 게 아냐.
경보장치가 해제된 가운데, 비밀 금고가 있는 은행 지하실로 들어가는 거라고. 사람들이 은밀하게 감춰둔 어마어마한 돈과 보석. "우리가 훔쳐도 아무 걱정할 게 없어. 왜냐면 그 누구도 신고하지 못할 테니까."②
"이건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야. 테리, 절대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돼"③. (It's an once-in-a-lifetime opportunity, Terry. We can't pass it up.)
테리는 공범이 될 친구들을 끌어들이려 꼬신다. 은행을 같이 털 친구들이란 게 3류 포르노 배우인 '데이브', 무명사진작가 '케빈'이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은행강도 할만한 재목도 아 아니라며 테리의 제안을 거절한다.
▲ 뱅크잡
데이브 : 그건 좀 간댕이 부은 짓이지, 솔직히 안그래.
테리 : 내가 더 겁나는 게 뭔지 알아? 가진 것 하나 없이 평생 거지같이 살다가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거야. 자, 맨날 신세 한탄만 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뼈빠지게 고생해봤자 남는 것 하나 없는 이 지긋지긋한 밑바닥 인생에서 확실하게 빠이빠이 하는 거야. 다들 알겠지!④ (Do you know what scares me more? "Living and dying with nothing to show for it." What I'm trying to say is, it's time we stop fucking about and stop picking the shit from under our fingernails.)
테리의 마지막 말에 데이브도 케빈도 이판사판 이젠 한번 해 보자고 마음을 정한다.
마틴과 케빈의 제안 협상 전략 : 놓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제안으로 상대를 유혹하라. (Entice your customer with a "Too Good To Lose" proposal. Grow his greed.)
사람은 누구나 머릿속에 저울을 하나씩 갖고 있다. 한쪽에는 내가 얻게 될 이익을 올려 놓고 그 다른 편에는 그 이익을 얻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나 대가, 혹은 감수해야 할 위험 등을 올려 놓게 된다. 그래서 내가 투입해야 할 비용(Cost) 대비 얻게 될 이익(Profit)이 크다고 판단이 서야만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욕심(Greed)이 무거우냐, 아니면, 반대쪽 두려움(Fear)의 무게가 더 무거우냐가 거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짓는 것이다.
아마 협상이란 바로 이 "상대의 머릿속에 들어 앉아 있는 저울의 눈금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술"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실제 그대로의 조건만으로는 상대의 저울질 결과, 투입 비용대비 실현 이익이 미미하다거나, 혹은 이러 저런 위험요소가 부담이 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즉, 상대의 저울 눈금을 매력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실질적인 덤을 오려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더 이상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과연 나는 상대의 저울에 올려진 비용과 수익의 무게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저울에 놓여진 비용과 수익의 무게를 추가 양보 제공 없이 적절하게 조종할 수는 없을까 란 고민을 해 볼 수 있다.
답은 '가능하다' 이다. 그리고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 본문의 마틴과 테리의 대사 ①,③,④ 처럼, 우선 상대의 기대이익(Expectation Profit or Gain)을 확대 재해석 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상대로 하여금 기존 이해하고 있는 금전적 수익(Fiscal Profit)등의 '일차적 이익(Primary Gain)' 외에도, '거대시장 진입,' '거래선 세계화', '선진기술 무상공유,' '기업브랜드 인지도 획기적 개선' 등,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뜻밖의 기회(Unexpected Opportunity)'로 인식되는 다양하고 매력적인 '부차적 이익과 혜택(Secondary Gains & Benefits)'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아울러서, 본문 마틴의 대사 ②처럼, 상대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나 감수해야 할 위험 수위가 상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다하거나 신경 쓸 정도가 아니란 논리를 곁들여서 제시하면 상대는 일단 '심리적 안도감(Psychological Relief)'을 느끼며 거래에 대한 반감이 누그러지게 된다.
▲ 뱅크잡
이처럼, '부차적 이익(Secondary Gains and Benefits)' 부각 협상전술과 투입 비용(Input Cost) 평가절하(Depreciation)와 내재 위험(Intrinsic Risk) 희석(Dilution) 전략은 궁합이 절묘하다.
즉, 내가 제시한 조건이 상대가 계산하는 비용이나 위험감수의 총량에 대비, 더 많은 이익이 되는 것으로 상대의 관점(Perspective)과 평가의 기준(Criteria)을 재정립(Reframing)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바탕으로 한 협상전술인 것이다.
즉, 당신의 제안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아니 놓치면 후회할 너무나 매력적인, 탐스러운, 욕심나는 제안으로 인식시켜 주는 협상전략이다.
실제로 이러한 '부차적 이익'을 절묘하게 제시하여, 실제적인 추가비용이나 양보의 부담 없이 괄목할 만한 협상성과를 올린 굵직굵직 사례들을 우리나라 M&A협상 사례들 가운데서도 의외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사례의 하나는 바로 90년대 말 GM의 대우자동차 인수협상이다.
당리당략을 중시하는 정치협상도 아니고, 대외명분과 현 집권세력의 국정철학이란 비경제적 논리의 영향을 받는 외교협상도 아닌, 돈 놓고 돈 먹는 기업간 M&A협상이었다.
즉, M&A 협상의 실질적 주 협상사안인 자산가치 평가금액 최대화 협상, 그리고 그에 근거 최대한의 매각가격을 가급적 현금으로 받아내고, 기타 제반 계약조건 역시 계약 당시뿐 아니라 향후에도 불이익과 역풍을 방지할 수 있도록 꼼꼼하고 철저히 계약서 조항 하나하나를 따졌어야 하는 비즈니스 협상으로서만 진행 처리만 되었더라면, 당시 우리측이 아무리 M&A협상력이 부족했더라도 6~70억 달러짜리 글로벌 자동차 기업을 어지간한 부품업체 가격도 안 되는 4억 달러란 헐값에 넘기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문제 기업이라며, 국가경제와 관련된 특수상황이라 논리로 정부가 개입하며 사단은 벌어지게 된다. 풀이한다면, 우선, 총체적 경제위기를 전대미문의 '빅딜'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세워 극복한 최고의 경제엘리트 정부였다는 역사적 위업과 치적을 쌓고 싶었던 관료주의와 정권 말 레임덕 현상에서 어떻게든 빠져 나오려 몸부림 쳤던 당시 정권이 있었고, 양측의 욕심과 코드가 맞아 떨어지는 불운이 우리에게 닥친 것이었다.
이것을 간파한 협상 당사자인 미국의 GM, 뒷돈 대는 투기자본,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거국적으로 헌신하는 각종 신용 평가기관, 컨설팅 펌, 언론매체, 그리고 미국의 정부가 참으로 유기적이고 전략적으로 협력하여, 기업 따로, 정부 따로, 언론 따로, 기관 따로인 우리 나라의 분열되고 미숙하기 이를 데 없는 국제협상시스템의 허점을 완벽히 파악하고 이용한다.
미국이란 나라와 기업이 국제협상에서 얼마나 밀접하게 협력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농락하며 최대한의 잇속을 챙기며 협상을 준비하고 임하는 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비단 대우자동차 뿐 아니다. 르노의 삼성자동차 인수 협상의 경우, 4차례나 결렬상황을 유도한 끝에 삼성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비타협적 협상전략을 고수, 자산가지 3조원의 삼성자동차가 최종매각가 6천억원이란 또 다른 헐값 기록을 세우기도 하는 등,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수 많은 헐값 해외매각이 당시에 이루어 진 것으로 알려진다.
▲ 르노-삼성자동차 M&A 협상과정
그러나, 해당 문제 협상에 개입한 인사들이 그 노고와 성과를 기려, 소위 영전을 하고, 국내 협상관련 학회에서 우수 협상사례로 크고 작은 상을 수상하고, 일부 언론은 정부의 홍보 자료에 발 맞춰 화려한 수식으로 성과를 드높이는 데 발 빠르게 대응할 뿐, 뼈를 깎는 반성도 제대로 된 방지대책 논의 한번 없었음을 기억한다.
게다가, 국민의 엄중한 심판은 피하고 개인의 영광은 끝까지 챙긴 선례를 남겨, 대한민국 21세기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세계 각국과의 FTA협상 역시, 미국측의 전술적인 의회 비준 지연 전략으로 협상종료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속절없이 공전하고 있는 한미 FTA협상과 같이, 자칫 책임은 지지 않고 잿밥에만 눈 멀어 돌이킬 수 없는 '부도성' FTA협정들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건 아닐까 심히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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