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협상전략: 인터내셔널 下] 노련한 상대일수록 논리가 아닌 가슴을 노려라.

작성일2010/03/25 조회수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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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상대일수록 논리가 아닌 가슴을 노려라

감독 톰 튀크베어
주연 클라이브 오웬(루이 샐린저 역), 나오미 왓츠(엘리노 휘트먼 역), 아민 뮬러-스탈(빌헬름 웩슬러 대령 역), 브라이언 F. 오번(킬러 역), 올리히 톰센(요나 스카슨 회장 역),
루카 바르바레스키(옴베르또 칼리니 회장 역), 패트릭 발라디(마틴 와이트 변호사 분)

이태리 총리 후보였던 옴베르또 칼리니 회장(루카 바르바레스키 분)의 암살 사건 배후로서 스칸센 회장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암살자의 뒤를 쫓던 샐린저 요원. 그러나 IBBC 스칸센 회장의 문제해결사인 웩슬러 대령(아민 뮬러-스탈 분)이 보낸 또 다른 암살자들과 구겐하임 박물관 안에서 벌어진 총격 끝에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던 암살자마저 살해되고 만다.

최후의 결정적 단서도 증인도 사라져 버린 지금, 샐린저 요원은 실의에 빠진다. 그러나, 뜻 밖에 동료 인터폴 요원들에 의해 스칸센 회장의 문제해결사인 웩슬러 대령이 체포되어 온 것을 알고, 그에게서 스칸센 회정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자백과 협조를 얻어내려 한다.

▲ 인터내셔널

그러나. 이미 다른 요원의 취조에도 불구, 자백도 협조도 않은 체 굳게 입술을 다문 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전혀 협조하지 않는 웩슬러 대령. 스칸센 회장의 범죄행각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인 웩슬러 대령을 설득하기 위한 샐린저 요원의 뜻밖의 최조가 시작된다.

샐린저 : 나는 은행을 살리기 위해 당신이 그 킬러를 죽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만역 당신이 이렇게 우리에게 잡힌 걸 알면 은행은 당신을 어떻게 할까요?

웩슬러 대령 :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일세.

샐린저 : 당신 기록을 봤는데, 이런 일에 목숨을 걸 사람은 아니 것 같더군요.
전 도무지 이해가 안돼요. 자본주의의 추악함에 맞서 동독 비밀경찰로 30년간 자본주의와 싸웠던 장본인 아닙니까? 그런 당신께서 왜 하필이면 그토록 경멸하던 자본주의의 상징인 추악한 은행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이렇게 허비하고 계신 겁니까? 부인은 바람나서 도망가고, 딸은 자살하고. 베를린 장벽과 함께 당신 삶도 무너진 거죠.

보람 된 일 하나 없이, 가슴 쓰라린 과거와 회한으로 점철된 실패한 인생의 뒤안길에 쓸쓸히 서 있는 자신을 돌이켜 보는 웩슬러 대령.

비록 자신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이자 악명 높고 잔혹했던 구동독의 비밀경찰인 스타시(Stacy) 출신이지만, 자신의 안위는 제쳐둔 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한 눈 팔지 않고 열정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루이 샐린저를 바라보며 공산주의적 이상과 정의감에 부푼 체 소신껏 일하던 젊은 날의 자신의 이제는 잃어버린 순수한 모습을 발견한다.

샐린저의 말대로 이젠 얼마 남지 않은 이 고단하고 죄 많은 생의 마지막에 찾아 온 참회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헛된 정의란 이상을 좇아가며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힘겨워하는 샐린저가 측은해서일까? 이유야 어떻든 웩슬러는 IBBC란 거대 국제 금융조직의 법을 초월한 막강한 권력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 즉 스카센 회장을 잡아들일 수 있는 묘책을 일러 준다.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스카센 회장과 IBBC의 붕괴를 불러 올 묘안이 다름 아닌 스카센 회장의 최측근 충복에게서 나올 줄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그리고 보스를 배신하는 이 마지막 작전을 할 수 있도록 기호를 준 샐린저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가슴속 깊이 묻어둔 말 한마디가 암살자의 손에 죽어가는 그의 입가에서 맴도는 것 같다. '고맙네.'

샐리저의 협상 커뮤니케이션 전략 : 노련한 상대일수록 논리가 아닌 가슴을 노려라. ("To generate people's understanding, commitment and, ultimately, their action-is to impact, not just their thinking, but their emotions." -Mark S. Walton)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공적인 연설의 3대 요소로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그리고 파토스(Pathos)를 꼽았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에토스를 연설자에 대한 청중의 신뢰나 호감으로 해석하며, 로고스를 논리력, 그리고 파토스를 연설자에 대한 청중의 감정적 순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협상의 초기에는 통상 호감과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되는 에토스 전략을 구사한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서는 여러 가지 사실과 분석을 치밀하게 전개하여 상대로 하여금 내가 내린 결론과 제안을 논리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로고스 전략을 펼치게 된다. 일반적인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에는 이 에토스와 로고스가 대단히 강조되는 반면, 상대의 감정에 호소하는 파토스는 등한시 되거나, 기피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즈니스에서 감정이란 요소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칫 잘 못 건드렸다간 일을 망쳐 놓을 수도 있기에 가급적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낫다"라는 일반론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우리 회사에 대한 상대의 신뢰도나 호감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우리가 제시한 계약 조건이나 내용이 경쟁업체 대비 그다지 현격한 경쟁우위를 점하는 것도 아니라면, 남은 방법은 이제 상대의 감정, 즉 마음에 호소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음에 호소한다는 건 도대체 실제로 어떡해 하란 말인가? 너무나 다양한 사람과 상황이 있기에 여기선 필자의 경험담을 통해 살펴 보자.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결코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나 회한의 기억 조각 몇 개쯤은 가슴 속 깊이 묻어 두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평생을 바쳐 온 직장을 떠나야 하는 은퇴시점에 이르면, 지나간 세월의 장면장면이 불현듯 너무도 또렷이 떠올라 섬뜩할 때도 없지 않다.

그 때 참 좋았었지! 그때 왜 그랬을까?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는 속절없는 회한이 물밀 듯 밀려온다.

국제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로 만난 그 역시 이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그런 글로벌 기업의 부사장이었다. 나이는 이제 예순을 갓 넘었을까 싶은데, 필자가 협상상대로 그를 처음 만났을 그는 몇 달이었으면 은퇴를 앞둔 시점이었다. 부사장 지위까지 오르는 동안 청춘은 저 만치 물러갔고, 서리 맞은 하얀 백발이 어느덧 검은 머리를 상당 부분 밀쳐내고 들어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국제비즈니스로 전세계를 섭렵한 탓인지 낯선 한국인인 나에게도, 노회한 국제 비즈니스맨 특유의 여유와 노련미를 매끄럽게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풀어야 할 협상 사안은 양사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 설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으로 이미 반년 이상 실랑이를 벌여 오다, 이젠 법정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돌입할 만큼 양사 모두에게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였다. 이미 사실공방이나 논리적 당위성 다툼은 양측 다 더 이상 할 얘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끝까지 간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만족스런 협상결과를 책임 진 필자로선 여간 골치 아픈 상황이 아니었다. 양측 모두 최종 합의조건을 제시했으나, 그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로 인해, 이제 상호 협력적인 협상은 물 건너 간 게 아닌가, 그래서 법정 소송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만큼 비관적인 상황에서 필자는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 최종담판을 짓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협상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실마리를 찾아 풀려 가기 시작했다.

그 실마리는 바로 그 부사장과 내가 협상 전에 주고 받았던 각자 출신에 대한 얘기와, 자녀가 다섯이라는 얘기에 깜짝 놀라며 자신은 네 명의 자녀와 두 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는 지극히 사적인 얘기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협상 중간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나누면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삼십여 년을 한 직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한눈 팔지 않고 정직하게 일해 온 자신의 지난 세월 에피소드에,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담과 같은 직장관을 피력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어느 새, 오랜 동안 잘 알고 지내온 직장 동료지간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서로에 대해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더 이상 우리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이러한 느낌은 마지막 협상과정에서 틀리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회사의 어려움을 마침 자신의 어려움처럼 애닯아하며, 그냥 곧이곧대로 사실을 말하며 솔직하고 맑은 심성으로 얘기하는, 어찌 보면 어수룩하기까지 하는 필자와 일행들과 얘기하며 조금씩 부드러워져 가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점점 우리의 입장을 수긍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우리자 제시한 최종 합의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협상에 동석한 다른 임원들이 그의 전행적인 태도에 짐짓 당황해 하는 모습 역시 묵도 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보스인 사장을 우리대신 설득해 주었고, 우리는 목표했던 수준에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것도 당초에 그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력하게 거부한 바로 조건으로 말이다.

자신의 인생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직장을 은퇴라는 이름으로 곧 떠나가는 노회한 비즈니스맨이, 그 마지막 장을 뜻있고 보람 있는 일로 마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성공하고픈 욕망도 부를 쌓고 싶은 욕심도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떨어버리고, 우리에게 선사한 의외의 배려와 마음 씀씀이는 그나마 그에겐 한 옹큼 인생의 후회를 덜어 내릴 수 있었던 뜻밖의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내 가슴에 가장 따뜻한 가슴을 가진 친구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치열한 국제 협상의 전장에서 나는 소중한 친구까지 얻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협상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새 내 가슴속 영혼의 숨결이 조금씩 흐려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영화 속 샐린저 요원의 대사, "저 노인네는 회개를 원하고 도와줄 건 나 뿐이오. (That relic in there is looking for redemption. I'm the only one who can give it to him.)" 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오늘 하는 협상에서 기업의 이익뿐 아니라 한 사람의 숭고한 영혼까지 건져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것이 바로 나의 영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위스콘신 매디슨 MBA 졸업
연세대학교 협상학 겸임교수
CJ 미디어 국제협상담당 상무 역임
역서 : 협상의 심리학